[르포]출퇴근 시간에 유독 사라지는 배려..'임산부 배려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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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출퇴근 시간에 유독 사라지는 배려..'임산부 배려석'
  • 임성영 기자
  • 승인 2019.12.24 09: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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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산부가 임산부 배지를 달고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서울 성북구에 사는 최윤경(36세) 씨는 얼마 전부터 이전보다 1시간30분 일찍 출근합니다. 퇴근 시간도 더 늦어졌습니다. 회사가 광화문에 있어 지하철로 출퇴근을 하는데 늘 서서 다녀 몸에 무리가 많이 왔기 때문입니다. 임산부 배려석이 있지만 앉아 본 적은 손에 꼽습니다. 그래서 아예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기로 한 겁니다. 

#예비맘 지수연(33세) 씨는 10년 전 운전면허증을 탔지만 이후로도 대중교통만 이용했습니다. 하지만 석 달 전 임신을 하면서 도로 연수를 다시 받고 직접 운전을 하고 있습니다. 임산부 배려석에서 임산부가 일반인에게 한 소리 듣는 걸 보고 운전을 다시 시작하겠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실제로 많은 임산부가 임신 후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에 불편을 호소합니다. 임산부 배려석이 있지만 임산부들이 '배려'를 받았다는 미담보다는 '무시'를 당했다는 사연이 훨씬 더 많이 들립니다. 임신한 게 눈치가 보여서 지하철과 버스 등 대중교통을 아예 타지 않는다는 임산부들도 종종 있습니다. 실태 파악을 위해 올리브노트에서 열흘 동안 임산부와 함께 지하철을 이용해 봤습니다.  

승객이 앉아 있는 임산부 배려석
임산부 배려석에 승객이 앉아 있습니다.

◇임산부 배려석 양보, 19번 중 단 한번..출퇴근 시간일수록 못 본 척

임산부와 함께 이용한 지하철은 1·2·6·9호선이었으며 이용 시간은 오전 7~10시, 점심시간 오후 5~9시 사이였습니다. 매일 아침과 저녁 출퇴근 시간과 점심시간, 오후 시간 등 총 19번 지하철을 탑승했는데요. 임산부 배려석에 앉아 있던 승객으로부터 양보를 받은 건 단 한 번이었습니다.

양보를 해 준 주인공은 바로 초등학교 4학년 학생이었는데요. 학생은 자리에 살짝 걸터 앉아 휴대폰을 보지 않고 주위를 살피더니 동행한 임산부의 임산부 배지로 시선을 한 번 주고 난 후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앉길 권했습니다. 

그 외엔 대부분 임신을 할 수 없는 성별이나 나이대의 승객들이 임산부 배려석에 앉아 있었는데요. 스마트폰을 보느라 주변을 살피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간혹 임신을 한 걸 확인했지만 못 본 척하는 승객도 있었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서울지하철불편신고 센터에 문자 접수를 해 봤습니다. '임산부에게 자리를 양보해 달라'는 방송이 나왔지만 실제로 비켜주는 경우는 없었고요. 2번은 안내 방송마저 나오지 않았습니다.

늦은 오전이나 오후 시간대, 승객이 많이 없을 때는 임산부 배려석이 꽤 비어 있습니다. 

그나마 자리가 많이 남는 이른 새벽이나 늦은 오전, 오후 시간대에는 임산부 배려석이 비어 있는 경우가 많아 몸은 물론 마음도 편합니다. 최윤경 씨가 임신 전보다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는 이유입니다. 

최윤경 씨는 "임산부 배려석이 정말 절실한 시간대는 사람이 많이 붐비는 출퇴근 시간대"라면서 "하지만 여유가 없는 시간대일수록 '배려'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그는 "그러니 스스로 살아날 방법을 강구해야 했고 그게 바로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는 거였다"면서 "여유가 없는 사회에 배려는 바라는 건 꿈"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임산부 배려석을 홍보하고 있는 서울의 한 지하철 역
캠페인을 통해 임산부 배려석을 알리고 있는 서울의 한 지하철 역입니다.

◇일부 임산부 "임산부 혐오 현상 겪어..임산부 배려석 없는 게 속 편해"

상황이 이렇다 보니 임산부 배려석을 '임산부 지정석'으로 바꿔달라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데요. 성별 간의 갈등은 물론 세대 간의 갈등으로까지 번지고 있는 문제라는 점에서 바뀌기 쉽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또 이름만 지정석으로 바꾼다고 해도 강제성을 띠지 않으면 지금과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서울교통공사 관계자는 "임산부 배려석을 두고 지금도 여러 갈등이 생기고 있어 명칭을 바꾸긴 어렵다"면서도 "우선 임산부석 비워두기를 주제로 다양한 방법으로 홍보를 해서 임산부 배려문화가 확산되도록 노력할 예정"이라고 말했습니다.

일각에선 차라리 임산부 배려석을 없애달라는 얘기까지 나옵니다. 임산부 배려석이 있음에도 양보를 받지 못하는 게 심리적으로 더 힘들다는 겁니다. 또 임산부 배려석이 오히려 임산부에 대한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것 같아 불편하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지수연 씨는 "임신 전엔 남의 일이어서 그냥 안타깝기만 했었다"면서 "그런데 내가 임산부가 돼보니 배려 받지 못한다는 게 정말 눈물 날 정도로 슬프더라"고 토로했습니다. 

지하철 임산부 배려석 앞 바닥의 표지
임산부 배려석 바로 앞 바닥에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이 보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임신 7개월에 접어든 유지연(35살) 씨는 "얼마 전에 지하철을 탔고 그냥 서 있었는데 갑자기 임산부 배려석에 앉아 계신 분이 '에이 임신한 게 유세라고!' 말해 깜짝 놀랐다"며 "첫째 때는 아예 사람들이 신경을 안 썼는데 임산부 배려석이 생기면서 오히려 불쾌감을 드러내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아 차라리 없을 때가 속 편한 것 같다"고 강조했습니다.  

한편 서울교통공사가 지난해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임산부 10명 중 9명(88.5%)이 임산부 배려석을 이용하는 데 불편했던 경험이 있었던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그 이유로는 '자리를 비켜주지 않아서'라는 응답이 59%로 가장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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